Getcoolizm 2009


keep it cool

여림

2007/03/27 01:12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 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 내내 순환선 열차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가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산으로도 강으로도
가고 아버지 산소 앞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이면 친구들을 만나 여느 날의 퇴근길처럼
포장마차에 들러 하루 분의 끼니를 해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름다웠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적문제로 조금 실랑이질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다음날 해야 할 일들로
가슴이 벅차 오히려 잠을 설쳐야 했다

이력서를 쓰기에도 이력이 난 나이

출근길마다 나는 호출기에 메시지를 남긴다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 「실업」 전문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여  림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근데 손뼉을 칠 만한 이유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어요.




                            소포를 부치고,

                            빈 마음 한 줄 같이 동봉하고

                            돌아서 뜻모르게 뚝,

                            떨구어지던 누운물.




                            저녁 무렵,

                            지는 해를 붙잡고 가슴 허허다가 끊어버린 손목.

                            여러 갈래 짓이겨져 쏟던 피 한 줄.

                            손수건으로 꼭, 꼭 묶어 흐르는 피를 접어 매고

                            그렇게도 막막히도 바라보던 세상.

                            그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울었습니다.




                            흐르는 피 꽉 움켜쥐며 그대 생각을 했습니다.

                            홀로라도 넉넉히 아름다운 그대.




                            지금도 손목의 통증이 채 가시질 않고

                            한밤의 남도는 또 눈물겨웁고

                            살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 있고 싶습니다.




                            뒷모습 가득 푸른 그리움 출렁이는 그대 모습이 지금

                            참으로 넉넉히도 그립습니다.




                            내게선 늘, 저만치 물러서 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여,

                            풀빛 푸른 노래 한 줄 목청에 묻고

                            나는 그대 생각 하나로 눈물겨웁습니다.



 



나는 집으로 간다  _ 여림




몇 번이나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햇살에도 걸리고 횡단보도 신호등에도 걸려

자잘한 잡품들을 길거리에 늘어놓고 초라한

눈빛으로 행인들을 응시하는 잡상인처럼

나는 무릎을 포개고 앉아 견뎌온 생애와

버텨가야 할 생계를 간단없이 생각했다

해가 지고 구름이 떠오르고 이윽고

밥풀처럼 입술 주위로 묻어나던 싸라기눈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나는 석유 난로 그을음 자욱한 포장마차에 앉아

가락국수 한 그릇을 반찬 삼은 저녁을 먹는다

둘러보면 모두들 살붙이 같고 피붙이인 사람들

포장 틈새로 스며드는 살바람에 찬 손 가득

깨진 유리병 같은 소주 몇 잔을 털어 넣고

구겨진 지폐처럼 등이 굽어 돌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오랜 친구처럼

한두 마디 인사라도 허물없이 건네고 싶어진다

포장을 걷으면 환하고 따뜻한 길

좀 전에 내린 것은 눈이 아니라 별이었구나

옷자락에 묻어나는 별들의 사금파리

멀리 집의 불빛이 소혹성처럼 둥글다






그날 이후/여림 시인을 기억하다





동네 골목 끝 헌책방에서 금방 나온 듯한 너의 유고 시집을 보았다.

어떻게 예까지 흘러왔을까? 세상은 아직 너의 죽음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닌지.

외로워, 외로워 죽을 것만 같다고 말했던 너의 시간이 책갈피마다

강물의 푸른 안개로 피어나고 때로는 인사동에서 마석 가는 막차를 놓치고 난 뒤의 쓸쓸함처럼

새벽안개로 흩어지는데,

벼랑진 너의 시간은 아직도 골목 끝에서 첫사랑처럼 나를 맞고,

쓸쓸한 여인숙방 너머에서 들리는 라디오 노랫소리처럼,

통화가 끊어진 뒤의 부재음처럼, 네 목소리가 단음으로 들려온다.


너는 헷빛 없이도 푸르렀는데,

물기 없이도 스스로 뿌리였는데, 그 모든 푸름과 뿌리리라는 게 상처였고

외로움이었다고 말하는 너를 주문처럼 속으로 읽는다.

상처로 깊어질 수 있었던 너는 정말 강물이었다.

열 손가락이 봉숭아보다 더 붉어 아프다*고 말했던 너의 시간이 오늘 내게로 와 꽃핀다.

술 취한 어둔 골목 모퉁이에서 더이상 토해낼 것 없는 살아가야 할 날들을

퉤퉤 뱉어내던 너의 흐려진 눈빛이 그랬을까.

네 눈 속 그 길고도 깊던 동굴이 끝없이 널 부른다고 했지,

그래서 넌 그 속으로 너를 스스로 거두어 간 것인지.

중환자실에서의 마지막 밤과 네 영정을 보던 그날 사이,

첫눈이 참 많이도 내렸다. 수천 마리의 새떼들이 널 데리고 갔다는 걸 사람들은 아직 몰라.

아마도 모를거야.





* 여림의 시 [손가락들이 봉숭아보다 더 붉어서 아프다]에서 변용함.


이승희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창비시선 258



* 여림 -

1966년생

서울예술대학 졸업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2년 사망

유고 시집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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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이수
2007/03/27 01:12 2007/03/27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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